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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최초작성 [WikiSysop 12.21 13:49] | 마지막 업데이트 [Vikiblue 08.07 16:34] 이 문서는 총 2,710번 읽혔습니다.

北京


중국 수도. 면적 1만 7,800㎢, 인구 1,100만 명(1992).


목차

| 편집 | 개요

상하이〔上海〕· 톈진〔天津〕과 함께 특별시이며, 화북평야 북단, 동· 북· 서 세 방향이 산에 둘러싸인 분지에 위치한다. 기후는 위도에 비해서 쾌적한 편이다. 행정구역은 10구(區) 9현(縣)으로 나뉘어 있고 시의 중심부는 베이징성 부근이다. 성내(城內)와 서교(西郊)에는 관청가와 교육기관이 있고, 동교(東郊)와 남교(南郊)는 금속· 기계· 방적· 화학· 식품 등의 공장지대이다. 6개 철도와 항공망, 그리고 도로망의 중심이다.


중앙관청 외에 중국과학원의 각 연구소, 인민대학· 베이징대학· 민족대학 등 많은 대학과 전문학원이 있다. 구궁박물관〔고宮博物館〕· 텐안먼(天安門)· 자금성(紫禁城)· 중국혁명역사박물관· 인민대회당· 중국미술관· 북경전람관· 군사박물관 등 문화· 교육시설이 많다. 자금성 내의 습찰해(什刹海)· 북해(北海)· 남해(南海)· 중해(中海)· 경산(京山) 등의 공원을 비롯하여, 국자감(國子監;현재는 수도도서관)· 공자묘(孔子廟)· 옹화궁(雍和宮;라마교사원)· 천단(天壇)· 도연정(陶然亭), 명나라 13릉 등 명소고적이 많다.


오대(五代)의 요(遼)나라 때에는 연경(燕京)이라 칭하는 부도(副都)였고 (金)나라 때에는 성을 넓혀서 중도(中都)라 칭하였다. 원(元)나라 때에는 신성(新城)을 건설하여 대도(大都)라고 하였다. (明)나라 때에는 처음에 난징(南京)을 수도로 삼았지만 영락제(永樂帝)가 대도에 천도하여 베이징이라 하였다. 1912년 중화민국이 수립된 뒤에도 수도였지만, 1928년 국민정부가 난징으로 이전하였고 한때 베이핑〔北平〕이라 개칭되기도 하였다. 중일전쟁 초기에는 국민당의 임시정부가 이곳에 있었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에 베이징이라고 정식으로 개칭하면서 수도가 되었다.


| 편집 | 역사

베이징은 천 년의 역사를 가진 도시로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생활 속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베이징을 종종 ‘천년(千年)의 왕성(王城)’이라 일컫는 데서 짐작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베이징이 처음으로 중앙의 역사에 등장한 것은 이미 10세기부터이다. 즉 거란족이 세운 요(遼)가 사실상의 수도를 이곳에 정했던 것이 시초이다. 그 이전 연(燕)이라고 불릴 무렵에는 진의 시황제에게 자객을 보내거나 당 말에 안록산이 현종과 양귀비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던 장소로서 단편적으로 역사에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의 중심은 역시 창안(長安)과 뤄양(洛陽)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연(燕)은 이른바 변경지대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요(遼)가 이곳을 ‘남경’이라 칭하고 수도를 정했을 때, 중원 지방에서 강한 세력을 펴고 있던 것이 송(宋)이다. 요는 이 송과 연합한 유목민 출신인 금(金)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후에 세력을 키운 금은 지금의 개봉(開封)에 있었던 송의 도읍을 함락하고 남쪽의 임안(臨安)으로 추격해 온다. 이때 개봉에서 가져온 전리품의 일부가 지금도 북해공원의 단성(團城)에 보존되어 있다. 커다란 옥으로 된 물동이와 경도(瓊島)의 산석군(山石群)이 바로 그것이다. 그 후 이곳은 금(金)의 중도(中都)로서 동아시아를 2분하는 세력의 중심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드물게 아름다운 다리’라는 찬사를 받는 노구교(盧溝橋)가 창건된 것도 이 무렵인 것 같다.


그러나 1231년 중도(中都)는 칭기즈칸이 이끄는 몽고 군에 의해 멸망한다. 여세를 몰아 몽고는 남송(南宋)도 침략해서 천하를 통일한다. 이후 중도는 천하의 중심지 대도(大都)가 되었다. 3대 쿠빌라이시대는 건축의 시대로 유명하다.


금(金)∙요(遼)의 모습은 모두 사라지고 그때까지 있던 건물규모의 몇 배가 되는 대도성(大都城)이 건설되었다. 경산공원(景山公園)을 세운 것도 역시 이 무렵이다. 성은 지금보다 훨씬 북쪽까지 뻗어 있었다고 한다. 이 번영을 자세히 기록한 이가 마르코 폴로다. 당시의 대도는 멀리 로마 교황의 명을 받은 선교사나 유럽, 이슬람 상인들로 붐볐으며, 무역이 성행했다. 지금의 고루(鼓樓)와 종루(鐘樓)근처가 당시의 번화가였던 것 같다.


원(元)을 멸망시킨 명은 영락제 치세 때 대도를 크게 개조했다. 자금성(紫金城)의 건설을 비롯해 성벽을 개량해서 북쪽을 성 밖으로 내보내 지금의 내성부(內城部)를 정비하고 나중에 남쪽 성벽을 둘러싸 외성부(外城部)로 했으며, 황제의 주거지도 벽을 쌓고 도량을 파 주위를 둘러쌌다.


명이 망한 것은 숭정제(崇禎帝) 시대다. 농민군 이자성(李自成)에게 쫓긴 황제는 시가가 내려다 보이는 경산(景山)에 있는 소나무에 목을 맸다. 경산공원에는 현재까지도 그 소나무가 남아있다. 이자성에게서 대도를 빼앗은 청은 명대의 도음은 그대로 쓰고 원명원(圓明園)등을 비롯한 정원공사를 시작했다. 만주족인 청은 한민족의 땅, 중국에서의 지배를 확보하기 위해 한족을 엄격하게 차별했다. 주민도 내성(內城)에는 당시 관료인 만주족을 팔기로 구역을 나눠 거주하게했고, 외성(外城)에는 서민인 한족들의 거리로 뚜렷이 구분 지었다. 이렇게 해서 산기슭에는 내성, 산 아래에는 외성이라는 독특한 분위기가 형성 되었다.


| 편집 | 천안문 광장

베이징을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찾아가는 천안문광장은 중국 현대사의 상징이다.


신해혁명 이후 1919년 5월 4일, 일본의 21개 요구사항에 반발한 학생들이 모여 5∙4운동을 전개 했던 곳이 바로 천안문광장이었다. 이 운동을 발판으로 새로운 시대를 모색하기 시작해 기나긴 혼란을 겪은 후인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한 곳도 역시 천안문광장이다.


60~70년대의 문화대혁명의 폭풍우 속에서 전국의 홍위병(紅衛兵)이 모여들고 훗날 문화대혁명 지도자에 대한 항의의 단서가 되었던 천안문사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1989년 6월 4일의 천안문 사태 등 격변하는 현대의 중국을 조용히 지켜본 것이 바로 이 천안문인 것이다.

  • 출처: 중국의 비밀


베이징올림픽 주경기장 앞에 설치된 음악분수에서 어린이들이 물장난을 치고 있다. 출처:중앙일보,2009.08.07
베이징올림픽 주경기장 앞에 설치된 음악분수에서 어린이들이 물장난을 치고 있다.

출처:중앙일보,2009.08.07

| 편집 | 베이징올림픽 그 후 1년

◆도시환경과 시민의식 변화

① 냐오차오(鳥巢) 주경기장과 국가수영장 주변은 베이징 시민들의 휴식처로 변모

② 올림픽 개막식이 열렸던 8월 8일을 ‘국민체육의 날’로 지정

2009년 들어 6개월간 베이징의 대기지수는 2급 이상 수준을 유지한 날이 2008년보다 23일 늘어난 146일을 기록해 최근 10년간 가장 깨끗한 것으로 조사됐다.

④ 교통 체증도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화됐다. 올림픽 기간에 시행했던 승용차 홀짝제를 변형해 2009년에도 5부제를 시행하면서 차량이 20%가량 감소했기 때문




| 편집 | 관련표제어

중국
베이징올림픽


| 편집 | 관련칼럼

북경서 만난 남북, 중앙일보 분수대, 1990.09.22
북경경제학, 중앙일보 분수대, 1985.12.12
북경∼서울항로, 중앙일보 분수대, 1984.10.24
북경의 행상, 중앙일보 분수대, 1979.11.20
북경 대지진, 중앙일보 분수대, 1976.07.29
북경의 포드, 중앙일보 분수대, 19751206
북경의 김일성, 중앙일보 분수대, 1975.04.19
북경의 포드, 중앙일보 분수대, 1975.12.06
포스트·북경, 중앙일보 분수대, 1972.03.09
북경의 이극송, 중앙일보 분수대, 1972.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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