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기반 전문지식 사이트
워크홀릭 바로가기
조인스 바로가기
new manual
도움말
연습장

TOP
(아소 타로에서 넘어옴)

아소 다로

최초작성 [Opentory 05.28 21:34] | 마지막 업데이트 [Vikiblue 07.01 13:26] 이 문서는 총 775번 읽혔습니다.

(麻生太郞, 1940- )

출처:중앙일보(2008.09.02)
출처:중앙일보(2008.09.02)


제92대 내각총리대신(재임시간:2008.09.24~ ).


일본 정치가, 실업가, 자유민주당총재(제23대), 중의원의원(9기), 경제기획청장관(제53대)


목차

| 편집 | 약력

자민당 총재의 신상 명세

출생 : 1940년 9월 20일 후쿠오카현

학력 : 가큐슈인대 정경학과, 미국 스탠퍼드대학원, 런던대 정경대학원

취미 : 만화책 읽기와 골프(싱글)

신체 : 175cm, 68kg, A형

성향 : 보수, 우파에 근거한 실용주의

전직: 아소시멘트(현:주식회사 아소)사장, 일본청년회의소 회장(1978년,재임기간 1년)

가족 : 부인 지카코(스즈키 젠코 전 총리의 3녀) 1남 1녀와 함께 도쿄 시부야 자택에서 거주

한국방문 : 2008년 2월까지 약 50차례


| 편집 | 경력

1973년 : 아소산업 사장

1976년 : 몬트리올 올림픽 클레이사격 일본 대표

1979년 : 후쿠오카에서 중의원 첫 당선

1983년 : 중의원 낙선

1986년 : 중의원 3선

1990년 : 자민당 문교부 회장

1993년 : 자민당 부간사장

1996년 : 경제기획청 장관(첫 입각)

2003년 : 총무대신

2005년 : 외무대신

2007년  : 자민당 간사장

2008년 : 일본 농구협회 회장

2008년 : 92대 일본 총리 선출


| 편집 | 정치가문 출신

2001년 이후 총재 선거 때마다 입후보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2001년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총리에 큰 표차로 졌고, 2004년엔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 2007년 9월엔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총리에 패했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당내 세력을 확보하고 인지도도 높였다.


아소 다로 역시 아베·후쿠다 총리와 마찬가지로 화려한 정치 가문 출신이다. 증조부는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 징용으로 악명 높았던 아소 탄광 창업주다. 규슈 지방 후쿠오카(福岡)에서 아소 탄광을 운영한 그의 증조부 아소 다키치는 일제시대 징용으로 끌려온 1만6000명의 조선인을 강제 노동시켜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


외조부는 전후 첫 총리였던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장인은 스즈키 젠코(鈴木善幸) 전 총리다.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전 총리의 외손자이기도 한 아소는 어릴 때부터 일본 우월주의 교육을 받아 왔으며, 일본 왕족들이 다니는 가쿠슈인(學習院)대학을 졸업했다. 스탠퍼드대와 런던대학원에 유학했다. 이후 가업인 아소산업 사장을 지내다 1979년 정계에 입문했으며 9선 의원이다.


아베 내각 시절 외상을 지낸 아소는 일본 내 대표적인 강경 보수로 통한다.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희망해 이뤄졌다” “6·25전쟁은 일본에 도움이 됐다”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다. 또 “우리에게 야스쿠니 신사는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와 같은 곳이다. 야스쿠니 참배는 정당하고 앞으로도 계속하겠다”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만화 애호가이자 몬트리올 올림픽 때 사격 대표선수 출신이다.


| 편집 | 정치 철학

출처:중앙일보
출처:중앙일보


그는 일본 남부 규슈(九州)지방 후쿠오카(福岡)현 이즈카(飯塚)의 정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증조부 다키치(太吉)는 석탄 산업에 뛰어들어 성공한 뒤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전 총리 집안과 연을 맺었다. 아소의 외조부인 요시다는 일본이 패망한 뒤 1946~54년 총리로 재임하면서 한국전쟁 특수를 발판으로 일본을 재건시킨 인물이다. ‘미국의 방위우산 아래에서 경제발전에 전념한다’는 ‘요시다 독트린’은 일본 경제성장의 근본 철학이 됐다.

그의 정치 철학은 요시다에게서 출발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요시다의 무릎 위에 놀면서 “일본은 대단한 나라다. 어려움이 있어도 반드시 잘된다”는 외조부의 신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으면서 자랐다고 한다. 이런 영향으로 아소는 ‘일본은 아시아의 선구자’라는 강한 자긍심을 갖게 됐지만, 자연스럽게 그의 정치 노선은 보수 우파가 됐다. 그의 아버지는 3선 의원이며, 그의 부인은 1980~82년 총리를 지낸 스즈키 젠코(鈴木善幸)의 딸이다.


그러나 요시다의 또 다른 실용주의 노선이 아소에게 흐르고 있다는 평가다. 그가 다양하고 폭넓게 쌓은 경험과 견문도 영향을 줬다.

그는 개인적인 자격으로 했던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도 외상이 된 뒤에는 하지 않았다. “개인 신념과 국익이 부딪칠 때는 국익을 선택한다”며 주위의 우파 정치인들에게 양해를 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민당 관계자는 “이런 절제력은 자신의 동생을 요트 사고로 잃고 자신도 산과 바다에서 조난을 당해 두 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키운 균형 감각에서 생겨났다”고 분석했다.


실물 경제에 대해서도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갖고 있다. 아소 그룹에 입사한 뒤 71~73년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 주재하면서 다이아몬드 광산 등 해외 자원 개발에 전념했으며 33세에 아소 그룹 사장에 취임했다. 경제 철학도 기업 최고경영자(CEO) 출신답게 효율을 중시한다. 그래서 작은 정부를 추구하지만, 경기가 어려울 때는 재정 확대와 감세 정책을 써야 한다고 보고 있다.



| 편집 | 역사 인식

일본통치시절의 한국대만에 대하여,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바랬던 것이다." ,"일본은 한글의 보급에 공헌하였다."(2003년 5월 31일,도쿄대학교축제)


"일본이 식민지였던 대만에 의무 교육에 힘을 썼기때문에 대만은 매우 훌륭히 교육수준이 올라 문자인식률 등이 향상된 덕에, 지금처럼 교육수준이 높은 나라가 되었다." "역시 우리들의 선배들은 제대로 일을 잘 하였구나라고 솔직히 생각한다" (2006년 2월 4일 후쿠오카시의 어느 강연에서)


"객관적인 사실에 전혀 근거하고 있지 않다. 매우 유감이다."(2007년 2월 19일 중의원예산위원에서 미국하원이 제출한 위안부문제에 대한 결의안에 '일본군에 의한 강제적 성노예화'라는 기술에 대하여)


"양국이 야스쿠니문제에 너무 집착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당분간 매스컴이 야스쿠니 문제를 적지 않는 것이 제일 좋을 듯 하다." (중앙일보,2008.12.25 '한일,야스쿠니에 너무 집착해')


| 편집 | 경제철학

보수 우파에 근거한 실용주의


2008년 금융위기 관련발언

"일본만 경제침체라는 쓰나미에서 벗어날 순 없다. 그러나 일본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불황에서 벗어날 것"


| 편집 | 관련 표제어

후쿠다 야스오 제91대 내각총리대신

아베 신조 제90대 내각총리대신

고이즈미 준이치로 제87,88,89대 내각총리대신

야스쿠니 신사


| 편집 | 관련칼럼

아소 어록 중앙일보,분수대,2008.09.29

List

insert form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