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崇禮門:남대문(南大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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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12월 국보 1호로 지정된 국내 대표 문화재다. 한양 도성의 8문 중 가장 중요한 정문이며, 현존하는 국내 성문 건물로서도 가장 규모가 크다.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됐지만 2008년 2월 12일 방화로 인해 불에 탔다.
조선 왕조가 한양으로 천도한 뒤 1396년(태조 5년)에 짓기 시작해 1398년에 완공됐다. 1448년(세종 30) 개축했다. 2005년 5월 숭례문 주변에 광장이 조성됐으며, 2006년 3월 홍예문이 일반에 개방됐다.
관악산의 화기를 맞불로서 꺾기 위해 다른 문들과는 달리 편액을 세로로 썼다. 앞면 5칸, 옆면 2칸으로 2층 건물인 이 문의 지붕은 우진각지붕으로 상하층 모두가 겹처마로 되어 있고 사래 끝에 토수(吐首)를 달았다. 추녀마루에는 잡상(雜像)과 용두(龍頭)를 두고, 양성한 용마루에는 취두(鷲頭)를 두었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다포계 목조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조선 초기 건축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잘 보여주며, 1962년 해체복원공사 때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은 당시의 건축생산체계와 장인조직을 밝히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오행에서 남쪽을 가리키는 예(禮)를 숭상한다는 의미를 담아 숭례문이라 이름했으나 지금은 남대문으로 일반에게 알려져 있다.
1907년 대한제국 순종 황제의 즉위를 축하한답시고 조선을 찾은 일본 황족 때문에 숭례문은 오른쪽 날개를 잃었다. 일본 황족이 숭례문에 예(禮)를 갖출 수 없다는 이유로 우측 성곽을 헐어 따로 길을 낸 것이다. 친일단체인 일진회는 일장기를 내걸며 침략자를 맞았다.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이 발굴한 숭례문 옆 ‘조선신궁참배참도(朝鮮神宮參道)’라고 쓴 석탑 사진이 그 증거다. 조선 총독부가 숭례문 옆에 신사 참배를 위한 석탑을 세운 일은 전문가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다. 정 관장은 “일본인들은 숭례문의 위상을 깎아 내리기 위해 남산에 그들의 종교인 신사를 짓고, 숭례문에서부터 시작하는 ‘참배로’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50분 숭례문 문루 2층에서 화재 발생
2008년 2월 11일 오전 2시 5분 숭례문 화재 5시간 만에 완전 진화
2008년 2월 문루 2층 목재 및 기와 등 훼손 부재 수습 및 정리 작업
2008년 4월 임시 가설 덧집 설치
2008년 5월 복구용 소나무 기증자 조사 및 고증자료 공개수집 시작
2008년 8월 15일 시민들에게 숭례문 복구 현장 공개
2008년 10월 10일 대법원, 숭례문 방화 채모(70)씨에게 징역 10년 실형 확정
2008년 11월 숭례문 설계 시작
2008년 12월 숭례문 주변 1차 발굴조사 완료
2010년 12월 숭례문 복구 현장 발굴 작업 종료 예정
2012년 12월 준공예정
2008년 11월 숭례문 화재 뒤 복원공사에 앞서 외부지역 발굴조사에서 당시 생활했던 모습이 발굴됐다. 조선시대의 포장된 길은 현재의 지표면에서 30~60㎝ 아래이다. 조선 후기부터 대한제국 말기까지 사용된 도로 흔적이었다. 19세기 후반부터 일제강점기에 걸쳐 진행된 각종 공사로 땅 밑에 묻혀 있던 조선시대 도로가 발굴됐다.
이 도로는 갈색 사질토를 6~8차례(약 130~140㎝) 쌓아 바닥을 다진 뒤 그 위에 박석(薄石·지금의 보도블록 역할을 하는 얇고 넓적한 돌)을 덮어 노면을 포장하는 정교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도로 폭의 경우 숭례문 바깥쪽(서울역 방향)은 25m, 안쪽은(도심 방향) 26m에 달한다. 숭례문을 통과하는 도로 중앙부에서는 박석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는 1899년 일제가 전차 선로를 가설하면서 제거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에 훼손된 숭례문 동·서쪽 성벽의 기초 부분도 확인돼 성곽 복원 작업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번 발굴조사에서는 민가 터 3동을 비롯해 구들 시설, 배수 시설 등 과거 숭례문 근처에 즐비했던 민가의 흔적도 함께 발견됐다.
또 숭례문 내부 북서편 지하 3m 지점에서는 조선 전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터가 확인됐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 묘인 준경묘 주변에는 국내에서 가장 품질이 좋은 금강송 군락이 조성돼 있다. 고종 때 경복궁 중수와 1961년 숭례문 중수 공사에도 이곳 소나무가 쓰였다. 문화재청은 600년 전 숭례문이 축조됐을 때도 이곳의 금강송을 썼을 것으로 추정한다.
벌채에 앞서 준경묘에선 숭례문 복구 사업의 성공을 기원하고 금강송을 떠나보냄을 고하는 고유제(告由祭)가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준경묘 봉향회 주관으로 열린다. 이어 문화재청 주관으로 산신제를 봉행한 후 금강송 한 그루를 벌채한다. 준경묘 주변의 스무 그루가 내년 3월까지 순차적으로 벌채된다. 건조와 재단을 거쳐 숭례문의 기둥·보 등 주요 부재로 쓰일 예정이다.
2010년 초부터는 문루 복구와 주변 성곽 복원 등의 공사가 시작된다. 단청을 입히고 주변 정비가 완료되는 2012년 말 숭례문은 다시 국보 1호의 위용을 드러내게 된다.
기와
방화로 기와 05% 이상 망가져. 전통방식대로 찍고 구워도 내구성에 문제 없을지 연구 중.
기존 기와는 전시장 소장, 일부는 베를린 장벽 조각처럼 시민들에게 나눠줄 것 고려중.
박석
발굴 통해 조선 후기 도로 발견, 당시처럼 석재(박석)를 깔아 시민들이 걸을 수 있게 조성
현판
완전 해체해 세척 작업 중. 2008년 12월 현재 70% 진행, 무형문화재 오옥진선생이 현판의 서체 복구
목재
시민들 기증 의사, 제보 따라 둘레가 40cm 넘는 금강송 167그루 확보. 선정된 주인 12명 기증 약속
성곽
일제가 훼손했던 성곽 복원. 서울역 쪽에서 바라봤을때 왼쪽 10m, 오른쪽 70m 정도의 벽이 생긴다
불탄 숭례문 중앙일보,분수대,2008.02.12
국보의 집 중앙일보,분수대,2004.10.19